빵이라는 핑계
사는 것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하면 어긋난 생각이 싹트기 시작한다. 아무리 밟아 없애도 잡초처럼 머릿속 전체를 안 좋은 쪽으로 가득 메운다. 구역질 쏠리는 못된 가지는 점점 현실을 부정하고 세상과의 단절을 택한다. 그리고 배고프다는 이유로 세상이 합의한 큰 흐름을 역류하며 제 불만을 해소한다. 혹자는 불법이라 부르고 범죄라 쓴다.
웃긴 건 범죄라고 쓰는 인간들 대부분은 최소한의 삶을 이어갈 수 없어 미필적으로 자행하는 게 아니라 비뚤어진 욕망으로 눈빛을 밝히는 자들이다.

그랬다,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나도 불법이나 비정상적인 방법을 쓰더라도 잘 살고 싶었다. 결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아니, 불법이나 비정상적인 방법조차 모르는 처지에선 그저 낮고 조용히 견뎌내는 방법밖엔 없었다. 오늘처럼 내일도 그림자로 납죽 엎드린 채 비가 오시기를 기도했어야 했다.


서슬 퍼렇게 칼날을 벼리는 이유는 싸우기 위함이 아니라 그러지 않고도 타인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함이다. 시퍼렇게 날 선 칼로 핏빛 불꽃을 일으키며 싸우는 것은 그래서 목숨을 내놓은 도박이다. 엄지로 꼽아주는 칼잡이는 제 칼 한번 보여주는 것만으로 능히 상대가 꼬리를 내릴 수 있는 자이다. 꼬리를 내린 자는 개보다 더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다 생의 마침표를 찍는다.




그의 칼은 긴 호흡으로 힘을 실어 파고들었고 놈의 칼은 짧은 숨을 재가며 여리고 구부러져 주먹으로 때려도 아플 곳만을 후볐다. 그리고 빠르게 다가서 끊어하는 호흡마저 가쁘게 만들었다. 목을 향하던 놈의 칼이 슬쩍 속도를 늦추는가 싶었는데 이내 팔등을 베었다. 옆구리를 벨 요량이었지만 그의 칼이 놈보다 찰라 빠르게 막아냈다.
쩌엉하며 칼 끝이 우는가 싶더니 손바닥 전체가 아려온다. 빠른 칼에 힘을 실어 내공으로 베어낼 줄이야…
싸구려 시정잡배의 칼이었지만 고드름같은 냉기가 그의 가슴 전체에 와 박혔다. 쓰리고 인상을 구겨뜨릴만큼 아픔이 저릿저릿하다. 짧고 얕은 놈의 칼 덕분에 하마터면 손목을 내줄 뻔 했다.



막아냈나 싶을 때 또다시 날아드는 놈의 칼. 이번엔 목울대다 할 무렵 벌써 지나쳐 버린다. 베였다. 차갑게 아픈 피가 흐른다. 쓰렸다. 또 다시 날아든다. 아니, 이번엔 찌른다. 털끝만한 인정도 없이 인중을 찔러대는 놈의 칼이다.
몸을 뒤로 빼며 반원을 그린다. 반원을 그리던 칼이 멈추는가 싶을 때 어김없이 놈의 어깨를 파고든다. 쇄골을 무너뜨리고 가슴 한켠을 내줘야 할 쯤에야 칼이 멈출 것이다. 그리고 녀석의 숨도 더이상 세상에서 찾을 수 없게 될 것.


놈의 칼이 쩌렁하며 쇄골을 막아내더니 옆구리를 노린다. 소리도 없었는데 옷자락이 한뼘 떨어져 나갔다.
어찌 그것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미처 다 끝내기도 전에 어깻죽지가 저릿하다. 녀석의 칼이 스쳤고 붉은 피가 울컥거렸고 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짧은 숨이었길 다행이지 깊은 호흡이었다면 팔 하나를 내줬어야 했을 게다.



녀석의 칼은 짧고 재빨랐지만 호흡은 그보다 길었기에 여러 번 칼이 그의 숨통을 향했다. 막아냈다 싶었을 때 그의 칼이 녀석의 눈을 겨누고 시야와 같은 한 일 자로 날린다. 막아내지 못하면 눈을 내줘야 하고 까딱 몸이 늦으면 깊이 아프게 될 것이다. 녀석보다 둔하게 움직였지만 일정 궤도에 다다랐을 때엔 보이지도 않게 녀석의 눈앞에 칼을 내몰았다.



쩡하고 불꽃이 일더니 녀석의 칼과 그의 칼이 서로 할퀴어 댔다. 저런 자세에서 어찌 이 칼을 마주할 수 있었지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귓가가 뜨끔했다. 뜨꺼운 어떤 것이 뜨끔한 곳에서 느껴진다. 잠깐 귀가 시려운가 하더니 이내 뜨거워진다. 귀를 베였구나. 뒤이어 도포 두 뼘정도가 떨어진다. 왼쪽 팔에서도 뜨거움이 작렬한다.
이 자는 살인귀다. 더이상 알량한 마음에도 없는 적선을 떠올려서는 안된다. 그의 칼이 잠깐 멈추듯 흔들리더니 빠르고 낮게 녀석의 허벅지를 향한다. 녀석이 몸을 접을 듯 둔해지더니 공중으로 튀어 오른다.
이것이다.
그의 칼이 급히 방향을 바꿔 낭심을 향한다. 녀석의 패랭이 한쪽이 잘려 나가고 손쓸 틈도 없이 가슴을 지나 오른쪽 허벅지 아래로 급히 떨어진다. 녀석이 주춤, 몸을 멈춰보지만 터진 듯 붉은 피가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